사진. 2010년을 기점으로 국가제사로 승격되어 점점 그 규모와 내용이 커지면서 국내외의 주목을 받고 있는 사마천 제사의 모습(2015년)



고전의 힘은 현실이 직면한 다양한 문제를 풀어나가는 지혜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데 있다. 나아가 미래를 위한 자기준비에 필요한 통찰력을 함께 선사한다. 역사서로는 아주 드물게 <사기>는 이런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는데, 이는 <사기>의 내용이 무엇보다 현실을 진단하는 힘과 역사의 미래 예견력을 설득력있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사마천은 “술왕사述往事, 사래자思來者”라고 했다. “지난 일을 기술하여 다가올 일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과거사를 보고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고 그에 대비할 수 있는 힘을 역사가 줄 수 있다는 점을 사마천은 이미 2천 년 전에 명확하게 인식했다.


21세기 대명천지에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국가 최고 통치자가 검찰에 불려나가 사법 처리를 기다려야 하는 참으로 부끄럽고 서글픈 일이 우리에게 발생했다. 사마천이 살아서 이 모습을 보았더라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는 통치자의 자질과 관련하여 이런 명언을 남긴 바 있다.

“부지기군不知其君, 시기소사視其所使.”

“그 군주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거든 그가 부리는 사람을 보라.”

요컨대 통치자가 기용하는 사람, 즉 인사人事를 보면 그 통치자가 어떤 리더이며, 어떤 리더십의 소유자인 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에게 벌어진 이 부끄러운 국정농단의 씨앗은 우리가 그런 통치자를 선택했을 때 이미 뿌려진 셈이다. 왜 그런가? 사마천의 말은 “그 나라 사람이 어떤 사람들인지 모르겠거든, 그들이 뽑는 지도자를 보라.”라는 뜻으로도 얼마든지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드 배치 때문에 중국이 단단히 화가 났다. 보복이 본격화되었다. 중국인의 특성으로 보자면 보복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큰 나라가 너무 쪼잔하다고 볼멘소리를 하는 이들이 많다. 광화문 광장에 나가 사드를 반대한다는 인증샷을 중국 쪽 기업에 보내는 자존심 상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어느 쪽이든 중국에 대한 원망의 목소리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정부의 한심한 태도다. 전략은 고사하고 당장 취할 수 있는 대책조차 내놓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바짓가랑이 붙들고 애원하면서 늘어졌지만 단칼에 무시당했다. 그럴수록 중국인의 감정은 악화된다. 이 단계가 지나면 혐오와 증오 그리고 천시로까지 악화될 수도 있다. 그나마 탄핵과 대선 날짜가 확정되면서 다소 수그러드는 기미지만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중국인의 복수심에 겁을 먹거나 놀라거나 미움을 갖는다. 문제는 중국인의 그같은 복수관의 뿌리를 이해하지 못한 채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두 나라의 관계는 풀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사마천의 <사기>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중국과 중국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깊이 있는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특히 뿌리 깊은 중국인의 ‘은원관恩怨觀’을 심각하게 인식할 수 있게 한다. 중국의 속담에 “은혜와 원수는 대를 물려서라도 갚는다.”는 것이 있다. 중국인은 사소한 은혜라도 꼭 갚을 것이며, 사소한 원한이라도 잊지 않고 반드시 갚으라고 한다. 중국의 드라마나 영화의 밑바탕에는 거의 예외없이 이런 ‘은원관’이 깔려 있지 않은가? 은혜와 원수에 대한 중국인의 인식은 그것이 하나의 민족성이 되어 유전자 깊이 박혀 있다.


<사기>에는 이같은 은혜와 원수를 주제로 한 중국인 특유의 ‘은원관’에 얽힌 고사들이 수도 없이 많이 등장한다. 사마천 자신이 억울하게 옥에 갇히고, 사형 선고를 받고, 살아남기 위해 죽음보다 치욕스럽다는 궁형을 자청하는 천추의 한을 겪은 장본인이다. 뿐만 아니라 이같은 한과 울분을 글(역사서)로 복수하는 한 차원 승화된 ‘문화복수’라는 복수의 새로운 유형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이 때문에 그는 자신의 역사서 <사기>에다 은혜와 복수의 스토리를 깊이 아로새겨 인간의 본성을 통찰했던 것이다.

인간의 삶에 은원이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을 어떻게 대하고 처리하느냐에서 차이가 날 뿐이다. 그래서 누구든, 어떤 민족이든 특유의 은원관이 생겨나 그것이 하나의 전통적 심리로 정착하기 마련이다. 중국인의 경우는 5천년 가까이 단절되지 않은 역사 속에서 다른 민족보다 한결 깊게 그같은 은원관이 형성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그런 관념을 알고 이해하면서 대책을 세우고 전략을 수립하는 일이 필요하다.


한 가지 더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다. 중국인 특유의 ‘은원관’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그저 은혜와 원한뿐 아니라 더 깊은 곳에 깔려 있는 ‘약속’과 ‘신뢰’라는 사실이다. 오죽했으면 “마음 속으로 한 약속도 지킨다.”는 말까지 있겠는가? 지금 중국이 우리에게 화가 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약속’과 ‘신뢰’가 깨졌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가장 먼저가 아니겠는가? 향후 대중국 관계를 맡을 사람들에게 <사기>나 관련된 책들을 차분히 읽으면서 이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곰곰이 되새겨보길 권한다. <사기>는 대단히 현대적인 역사서이다.



-글 김영수
중국 역사가 사성 사마천과 그가 남긴 불멸의 역사서 《사기史記》 연구가이다. 현재 한국사마천학회 이사장이며,우리나라 대표적인 《사기》 전문가로서 2007년 EBS 특별기획 '김영수의 《사기》와 21세기'를 강의 했다.<br/> 저역서로 《역사의 등불 사마천, 피로 쓴 사기》, 《사기의 경영학》, 《사기를 읽다》, 《사마천과의 대화》,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 새털보다 가벼운 죽음》이 있으며 최근 저서로는 《절대 역사서 사기》가 있다.